도서정가제 이후 파쇄되는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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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정가제 이후 파쇄되는 책들

 

도서정가제란 도서를 정가의 일정한 비율 이상의 금액으로 판매하도록 하는 재판매 가격 유지 제도이다.

도서정가제는 모든 도서에 정가를 적용하는 것으로 자본을 앞세운 대형·온라인 서점 및 대형 출판사의 할인공세를 제한하여 중·소규모의 서점 및 출판사도 같은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지식 전달의 기초적인 매개체인 책이 시장주의적 가격경쟁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업무자율협악의 형태로 시행되는 경우도 있다. 일본이 대표적으로 그러한데, 독점금지 관련법에 재판매 가격유지 금지의 예외사항으로 도서가 지정되어 있고, 구체적인 도서정가제 시행방법은 출판업 관계자들이 자율적으로 정한다.

대한민국의 도서정가제는 2003년부터 시행되었다. 2014년 11월 신간, 구간 상관 없이 가격할인을 15%로 제한하는 개정안이 시행되었고, 2023년 11월까지 연장 시행 예정이다. 현행 도서정가제는 본래 2017년까지 3년 간만 한시적으로 시행될 예정이었으나 출판계와 문체부가 도서정가제 연장 논의를 공론화하지 않고 은근슬쩍 연장시킨 이후로 계속 유지되고 있는 중이다.

도서정가제 개정안이 실시된 이후 도서 정가는 2016년 기준 5.7% 수준의 인하 효과를 보였다. 그러나 공론화 및 공개 토론 등 소비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부족하며, 소비자들의 실감 수준도 낮은 편이다.

도서정가제 개정안 이전, 대형·온라인 서점의 엄청난 할인율과 사은품은 소비자 입장에서야 만족스러운 일이었을테지만, 이는 사실 도서 출판 시장의 정상적인 발전을 왜곡시키는 수준이었다. 꾸준한 독서 인구 감소와 베스트셀러 위주의 구매 패턴으로 인한 시장 불황에 대해 대형 출판사들은 질적 경쟁이 아닌 손쉬운 가격 경쟁을 선택했고, 이들이 주도해온 제 살 깎아먹기식의 할인 경쟁은 심지어 베스트셀러 순위 조작을 위한 책 사재기로도 이어졌다. 이는 우선적으로 가격 경쟁을 따라가기 어려운 소형 출판사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고, 결국 시장 불황을 가속화시킨 끝에 대형 출판사 및 대형 서점의 영업 적자, 출간 종수의 꾸준한 축소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정가제 시행 이후에도 소형 출판사나 동네 서점의 사정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으며 대형·온라인 서점만이 호황을 누렸다. 그 이유는 도서정가제가 소비심리를 더욱 위축시켰다는 것도 있지만, 출판사의 대형·온라인 서점에 대한 홍보 및 매출 의존도가 여전하며 동네 서점 및 대형·온라인 서점에 대한 차별적 도매 공급률이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형·온라인 서점의 도서 매입가는 정가의 50~65% 수준이지만, 중·소형 서점은 이를 70~75%에 매입한다. 때문에 똑같이 매출이 줄어들더라도 출판사와 중·소형 서점은 타격이 큰 반면 대형·온라인 서점은 마케팅 비용을 영업 이익으로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출판사의 공급률 인상 문제는 출판사, 소형 서점, 도매서점, 대형 서점 간의 이윤 배분 문제가 첨예하게 얽혀있기에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출판사가 매출 의존도가 높은 대형·온라인 서점의 공급률을 마음대로 올리는 것도 쉽지 않거니와, 대형·온라인 서점입장에서는 도매 서점과 출판사 직거래 매입률 차이가 커질 경우 출판사 직거래를 피하고 도매 서점과 거래를 해버리면 그만이다. 그렇다고 도매 공급률과 대형·온라인 공급률을 동시에 높일 경우 도매 서점에서 책을 공급받는 지역 서점들에게 타격이 온다. 출판사가 지역 서점과 직거래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이번에는 지역 서점의 재고 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 이러한 마찰이 실제로 발생한 것이 2016년 7월 문학동네의 공급률 인상, 2018년 3월 북이십일의 공급률 인상 마찰이다.

도서정가제 강화에 대한 비난 여론에도 이를 도입하는 데 앞장섰고 그 효과를 설파하는 쪽인 일부 출판계 및 서점계 등의 입장은 여전히 완전도서정가제의 도입이다. 이들은 도서정가제의 취지를 살리고 관련 업계가 상생하기 위해서는 완전도서정가제 도입 및 독일식 표준 도서 공급률 법제화, 현금 결제 위주의 투명한 유통 구조 정착 및 도서유통정보 통합시스템 도입, 공공도서관의 확대 및 자료구입비 예산 증액, 독서 장려 및 출판 컨텐츠 강화를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관심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행 개정안에 대한 시각도 이미 좋지 않은데, 이러한 완전 도서정가제 도입에 대해서는 더욱 부정적으로 보는 여론이 많다. 또한 대한민국의 현행 도서정가제와 달리 일본은 완전도서정가제를 실시하지만 전자책이 적용대상이 아니라든가, 프랑스의 도서정가제는 2년 뒤엔 할인해도 된다는 점 등 대한민국의 도서 정가 규제 수위는 외국에 비하면 이례적으로 높은 편이다.

또한 중고책의 경우 정가제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알라딘, YES24 등의 온라인 서점이 중고책 오프라인 서점을 점점 늘려가고 있어 새 책은 안 팔리는데 출판사, 작가에게 돈이 하나도 안 돌아가는 중고책 시장만 커져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었다. 다만, 이러한 중고서점의 성공이 도서 시장 저변 확대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도서정가제의 긍정·부정적 영향 이전에 출판 업계 불황의 가장 큰 문제점은 독서 인구의 감소로 인한 시장의 축소 및 발행 부수의 감소이기 때문이다.

도서정가제 개정안 도입으로 인한 소비자의 도서 구매 부담을 줄이기 위해, 출판사는 납본 방식을 이원화하여 문고본 출간을 확대해야한다는 주장도 있다. 영미권의 경우 소설과 같은 서적은 하드커버, 페이퍼백, 매스 마켓 페이퍼백(갱지 같은 질적으로 상당히 떨어지는 종이를 사용함)으로 선택의 폭을 주고, 일본의 경우에도 먼저 하드커버로 출시한 뒤 신서판이나 문고본으로 출시하여 선택의 폭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출판 시장 규모가 작기 때문에 이원화 출간은 판매 부수가 보장되기 어려워 비현실적이다. 한국에서도 1980년대까지는 문고본이 인기 있는 제책 방식이었으나 단행본의 고급스런 디자인을 요구하는 소비 트렌드에 따라 점차 사라졌으며, 꾸준히 휴대용 판본으로 나오는 책들이 몇 가지 있긴 하지만 다양하진 않다. 2016년 윤동주, 김소월 초판 복간본이 크게 인기를 끌며 문고판 서적도 소장 욕구를 유발하는 고급화 전략과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였으며, 2017년에는 세련되고 깔끔한 디자인과 작고 저렴한 문고판 중·경장편 소설들로 다시 한번 문고판 열풍이 일었다. 이러한 트렌드가 이어질 경우 향후 소비자의 선택을 확대하고 구매를 유인하는데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