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백두산에도 일본이 쇠말뚝을 박아놨다는 사진이 나와 큰 논란을 야기했지만 실제로는 그런 거 없음으로 나타났다. 요즘에 와서는 뜸해진 것 같지만 이거 찾아내서 죄다 뽑아내자는 민족정기선양위원회이니 하는 조직들이 아직까지 활동한다.
한반도 쇠말뚝설은 이른바 일본 육군 장군 야마시타 전설에서 시작되었다. 즉 일본 패망 후 전범재판에서 일본 육군대장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영어 통역관이 신세우 라는 한국인이었는데, 야마시타가 조선에서 근무할 당시 조선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 수백 개를 박았다는 비밀을 형 집행 직전 신세우에게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언론에서 당시 재판기록과 문서들을 조사해본 결과 한국인 통역관은 없었고 쇠말뚝 어쩌고 하는 얘기도 전범재판 과정 내내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1995년 2월에 김영삼 문민정부 시기 내무부에서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쇠말뚝 뽑기를 국가정책으로 실시하여 118개를 뽑아낸 바 있다. 정부가 근거 없는 낭설을 믿고 실제 정책으로 추진한 역사에 남을 삽질.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용도를 알 수 없는 철심이 있다고 하면 바로 '일제가 풍수침략용으로 박은 철심이다!' 라고 하는 판. 나이든 세대 중에는 아직도 이 도시전설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이 많다.
당연히도 조선총독부 혹은 조선주둔 일본육군이 조선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하여 쇠말뚝을 박은 일이 없으니 그러한 기록이 없는 것이다.
국가 단위에서 어떠한 일을 추진하였다면 어떠한 형식으로든 기록은 남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일제가 한민족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는 계획을 추진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쇠말뚝을 어느 지역에 몇 개를 박겠다는 기본계획, 풍수지리에 따라 지역을 선정한 기록, 풍수지리에 자문을 한 사람들의 명단, 쇠말뚝 제조에 들어간 비용의 지출 기록, 쇠말뚝을 박은 사람들의 동원기록과 급여 지급기록 같은 것들이 당연히 남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기록은 없다.
역사에 관심 없는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조선총독부의 거의 모든 행정기록은 놀라울 만큼 상세하게 남아있고 지금도 한국의 연구자들이 그 기록을 활용하여 연구한다. 하다못해 일제시대 징용이나 위안부 동원 같은 일제의 악행들을 오늘날 일부나마 밝힐 수 있었던 것도 일본 스스로가 남긴 기록에 의한 것이다.
또한 쇠말뚝을 박아서 지맥을 끊는다는 발상 자체가 한국의 풍수지리 전설에서 등장하는 것이다. 풍수지리라는 개념이 한국나 중국에 비해 매우 약한 일본에는 이와 비슷한 전설이 없다. 오히려 일제시대 일본인들은 풍수지리를 미신으로 취급하고, 이런 미신이나 믿는 조선인은 미개하다며 일본이 이들을 근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써먹었다. 사실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에 들어와있던 서양 선교사 등도 공통적으로 한국의 풍수지리 관념을 매우 미개한 것으로 비판하였다.
일본은 풍수에 관심이 없었고 측량과정이었을 뿐이라는 내용은 이이화가 역사풍속기행에 쓴 것으로, 각 언론보도로 내용이 알려지자 적잖은 반발이 일어났다. 한국우리민족사연구회의 유왕기 연구위원은 이이화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위치 표시용 쇠말뚝은 바위에 20~30 cm 정도면 충분하며 (풍수침략용 쇠말뚝처럼) 1 m 이상 박지는 않는다. 일본은 한국침략을 위해 역사 지리 풍수 등을 열심히 연구했다. 침략 후에는 모든 관사를 명당자리에 지었다.” 하고 반박했지만, 역시 '그럴 것'이라는 답을 미리 내놓고 하는 내용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