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임금은 하루에 총 5번의 수라를 받았다. 이 중 12첩 정식은 오전 10시와 오후 5시의 두 번이며, 이를 전후로 하여 아침은 초조반상(혹은 일어난 자리에서 바로 먹음을 뜻하는 자릿조반), 점심은 낮것상, 밤에는 야참이라 하여 국수나 미음, 약식 등 간단한 상을 차렸다.
그 양은 엄청나게 많아서 왕 혼자서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양이었다. 조선 왕조 최고의 미식/대식가였던 세종대왕조차 반도 못 먹을 듯한 분량을 자랑한다. 이는 '물림상'이라고 해서 일부만 먹은 뒤 남은 반찬은 왕이 식사를 마친 뒤 밥만 새로 퍼서 왕 밑의 신하들이나 궁중 나인들이 먹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기준에서 좀 이상한 풍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는 왕이 신임하는 사람에게 왕의 음식을 내려준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윗사람들은 반찬도 아랫사람들을 생각해서 손을 최대한 깨끗하게 댔다. 조선만 그랬던 것은 아니라 과거 신라 태종 무열왕의 식사 기록에서도 수라상의 엄청난 양에 대한 기록이 나오고, 아랫사람에게 음식을 남겨주는 것은 유럽에서도 비슷한 풍습이 있어 빵을 요리를 담는 그릇으로 쓰고, 왕이 요리를 먹은 뒤 남은 고깃국물 머금은 일회용 식기는 영주가 가난한 영민들에게 베풀었다.
현대인에게 반찬 12가지는 "왕이 먹는 반찬치고는 종류가 좀 적은 것 아닌가?"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이건 현대인이 차려먹는 밥상에 원래 들어가는 반찬은 첩수만 늘었지, 퀄리티가 떨어지기 때문에 드는 착각이다. 즉, 원래 전통 반상은 첩수가 올라가면 양만 느는게 아니라 질도 하나하나가 서양으로 치면 전채요리 급으로 돌변하며, 수라상 급까지 오면 반찬 하나하나가 대단한 수준으로 바뀐다.
현대는 기술의 발달로 농업 생산량 자체가 늘어나서 대량생산을 통해 단가가 낮아졌고 정 부족한 식자재를 수입할 수 있어서 단가를 더욱 낮출 수 있지만 당시 식자재는 농약이고 뭐고 없는 100% 유기농 국산 식자재밖에 없던 시기다. 현대에서도 저런 좋은 재료로 한상 차리려면 돈 꽤나 드는데, 심지어 식자재의 수급과 관리, 조리과정 모두 현대처럼 기계화가 되어있지 않아서 전 과정이 수작업의 연속이였다. 즉 현대 기준으로도 사치스러운 상차림인데 하물며 평균 소득이 더 낮은 그 당시 기준에선 정말 왕의 품격에 걸맞는 상차림이 아닐 수 없는 셈.
게다가 이 분류법은 밥, 국, 찌개나 전골, 김치류, 장류 같은 기본 메뉴들은 첩 수에서 빠지며, 사이드 메뉴만 쳐서 계산한다. 근데 이 반찬 분량과는 별개로 밥의 양은 막걸리 떠먹을 듯한 국그릇 스케일의 그릇에 꽈악 채웠다. 수라상의 경지에 와도 밥상의 주인은 원칙적으로 밥이지만, 수라상 수준은 커녕 7첩 수준만 와도 밥상의 주인인 밥이 묻힐 정도다. 이 반상이란 게 딱 보면 3첩 조차도 어지간히 부유한 양반이 아니면 못 해먹을 상차림이다. 사실 3첩은 서민 밥상, 5첩은 경제능력이 좀 되는 평민 밥상으로 부류되는데 5첩이 경제력 되는 평민 밥상인건 경우에 따라선 가능했겠으나 3첩이 서민 밥상인건 불가능에 가까웠을것이다. 3첩은 국과 김치가 기본 반찬인데 당시엔 하루하루 먹고사는것도 힘든게 서민들이었다.
당시 고기가 부족해서 3첩, 5첩상이 소박해 보이는 것일 뿐, 만약 당시에 고기가 지금처럼 흔했다면 5첩상만 와도 스테이크가 국이나 김치처럼 기본반찬으로 날아다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조선시대 왕의 업무량은 정말 무지막지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 먹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단, 한민족의 식사량 문서에 나와있듯 일반 백성들도 대식하는 습관이 있었으므로 호화로운 것이 맞지만 그리 특별할 건 없었다. 격무에 시달렸다고 해도 업무상의 격무지 운동선수나 군인처럼 몸을 많이 움직여야 하는 일도 아니었고.
수라상 차림의 기본 이념은 '조선 팔도'에서 올라온 음식을 담는다는 것으로, 이는 왕이 식사중에도 나라를 살핀다는 의미 역시 담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각 지역의 특산물인 진상품으로, 그것도 재료가 겹치지 않도록 반찬을 만들었는데, 해당 반찬이 양이 줄거나 빠지거나 바뀜으로 해당 특산물이 나는 지역에 뭔가 문제(대표적으로 흉년)가 발생함을 왕에게 알리고 또한 살핀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나라에 큰 흉년이 들거나 자연재해, 전쟁 등으로 나라 살림이 어려울 때는 임금이 자발적으로 수라상의 반찬 가짓수를 줄이는 감선(減膳), 혹은 고기를 올리지 않는 철선(撤膳)을 했다. 극단적일 때는 말 그대로 죽 한 그릇만 올리기도 했다. 이는 신하들에게도 암묵적인 압박이었다. 이 말은 '나라가 어려워 나도 이렇게 먹는데 니들은 호화로운 밥이 넘어가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임금이 아예 수라 자체를 거부하면? 그 때는 궁궐과 조정 전체가 발칵 뒤집힐 정도의 대형 사고. 그래서 조선 임금의 단식은 일종의 파업이자 시위이기도 했다. 비단 임금뿐 아니라 임금의 어머니인 대비, 할머니인 대왕대비도 아들이나 손자에게 시위할게 있으면 곡기를 끊고 버틴다. 다른 왕족도 마찬가지.
수라상은 크게 3개의 상을 쓴다. 주된 상인 대원반에는 흰수라(백미밥)과 국, 각종 장류와 김치, 반찬, 토구를 올렸고 곁반에는 팥수라(팥밥과는 다르다. 팥을 넣은 게 아니라 팥을 끓인 물로 밥을 지어 색을 입힌 것이다.), 곰국, 기타 별식 등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책상반에는 찜과 조치(찌개), 전골류를 올렸다. 물론 임금도 사람인지라 세부적인 반찬들의 종류는 임금의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바뀌기도 하였다. 가령 세종의 경우 고기 반찬이 항상 빠지지 않은 반면, 영조와 정조는 서너 가지의 채소 반찬으로 단촐하게 차린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연산군은 정력에 좋다고 한 민물장어와 말고기 육회를 즐겨먹었으며, 대한제국 때 고종과 순종은 서양 요리를 먹기도 했다.
대장금 등 대중매체의 영향으로 수라상을 100% 궁녀들이 차린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론 대령숙수라 부르는 남자요리사들이 수라상을 차렸고, 궁녀들은 숙수들이 퇴근한 야간에 급히 식사가 필요할 때나, 왕실 어른들의 간식 정도만을 만들었다고 한다. 100% 궁녀들이 차렸다는 오해는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남자 숙수들은 궁을 떠나 요릿집에 취업하여 궁에 남아있던 궁녀들이 어쩔 수 없이 수라상을 전담하게 되었는데, 이 궁녀들이 해방 이후 궁중한식을 전수하게 되면서 생긴 오류였다고 하며, 칼럼니스트 황교익이 문제에 대해 몇차례 칼럼을 통해 지적한 바 있다. 또한 여기에 내시부의 수장인 상선(판내시부사)이 수라상을 담당했는데, 이는 수라상을 비롯한 왕실의 음식 준비를 총감독하는 형태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