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명이 사망한 '우크라이나 대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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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명이 사망한 '우크라이나 대기근'


2020. 12. 6.

1932년~1933년에 소련 치하에 있던 우크라이나(당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발생한 대기근이다.
소련의 스탈린은 신경제정책으로 느슨해진 식량 생산 도시 노동자들의 불만이 증가하자, 사회주의적 집단화 정책으로 통제를 극대화 함과 동시에, 계획적이면서 효율적으로 식량을 생산하려 했다. 하지만 자영농들은 자기들이 힘들여 일군 농사의 열매들이 자기들이 아니라 집단농장으로 넘어가게 되니 당연히 반발했고, 따라서 당시 공산주의의 큰 목표였던 집산화 자체도 느리게 전개되었고, 곡물의 생산량도 당국의 기대보다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특히 우크라이나는 토지가 비옥하고 넓어 전통적으로 자영농의 영향력이 강했는데, 집단화 정책과 함께 곡물 생산량의 대부분을 제공하던 쿨락(부농)들을 소련 정부가 때려잡기 시작하자 생산력이 바닥까지 내려갔다. 이렇게 집산화 정책이 농민들의 반발로 인해 재앙적인 효과를 초래하게 되자 스탈린은 어쩔 수 없이 곡물 수탈 계획을 대대적으로 축소하고자 했는데, 집산화로 워낙에 농업 생산력이 망가져버린 까닭에 우크라이나의 경우 수탈량을 원 계획에서 3분의 1까지 줄였는데도 최악의 국면을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목축업 문제 역시 심각했다. 가축을 기르는 체제가 갑작스레 집단화되자, 농업지식이 전무했던 공산당원들은 온갖 문제에 부딪쳤다. 거기에 사료도 부족했고 날씨마저 돕지 않았다. 그리고 또 원시적인 농업에서 밭을 갈던 말 등이 기아로 쓰러지면서 다시 파종 등 농업에 차질을 빚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이 당시 우크라이나는 아직 기계화 영농이 발달하지 못했기에 마소와 같은 가축은 필수적인 농사 수단이었다. 가축 수의 절대 부족은 바로 농업 생산량의 격감으로 이어졌고, 식량 부족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1932년경에는 농작물의 작황 또한 좋지 못했는데 고르지 못한 날씨와 농업 사보타주가 겹친 결과였다. 이 지경에서 국가에서 할당한 징발량을 억지로 채우고 나면 당장 끼니를 때울 식량마저 없는 경우가 허다했고, 그러한 사태를 가장 집중적으로 직면했던 국가가 바로 우크라이나였다.

이 대재앙으로 인해 1931-33년 사이 소련 전역에서 식량 부족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는 사망자는 700만에서 1100만으로 추정된다. 기근에 이은 전염병까지 포함이며 이와 별도로 200만명이 중앙아시아 시베리아로 추방 쿨라크로 몰려 350만명이 수용소에서 사망한 걸로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