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진리교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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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진리교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2021. 8. 30.

때는 1995년 3월 20일. 월요일. 기분 좋게 맑게 갠 이른 봄날 아침이었다. 바람이 아직 차가워서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모두가 외투 차림이었다. 바로 전날은 일요일, 그 다음 날은 공휴일 - 즉, 징검다리 휴일 사이에 낀 평일이었다. 어쩌면 당신은 '오늘 하루는 쉬고 싶었는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당신은 휴가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당신은 평상시와 같은 시간에 눈을 뜨고,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고, 옷을 챙겨 입고 역으로 향한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혼잡한 지하철에 몸을 싣고 회사로 향한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지극히 평범한 아침이었다. 인생 가운데 구별할 수 없는 단 하루였을 뿐이다.

 

가발을 쓰고 가짜 수염을 붙인 젊은 남자 다섯 명이 갈개로 뾰족하게 갈아둔 우산 꼬챙이로 기묘한 액체가 든 비닐봉지를 찌르기 전까지는.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은 1995년 3월 20일 월요일, 일본 도쿄에서 옴진리교가 일으킨 대규모 지하철 화학 테러 사건으로, 세뇌된 광신도를 동원해 도쿄 지하철에서 독가스인 사린을 살포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일본 사회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정부 기관에 대한 공격이라고 볼 수 있는데, 당시 지하철 운영 기관이었던 제도고속도교통영단이 민영 기업으로 개편된 것은 사건 9년 뒤인 2004년 4월 1일이므로 사건 당시 영단은 재무성 산하 관공서였고 기관사 및 역무원을 비롯한 직원들도 국가공무원 신분이었으며, 옴진리교의 타겟이자 주요 희생자였던 국가공무원들도 영단 지하철로 통근했기 때문이다.

테러와 관련된 학술지에서 이 지하철 사린 사건을 9.11 테러만큼, 혹은 그보다 더 비중 있게 다루는 경우가 많은데, 왜냐하면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 인류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하게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한 테러 사건이기 때문이다. 물론 해당 사건은 불과 십수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키는 데에 그쳤지만, 생화학무기가 테러에 성공적으로 사용된다면 최소한의 물질로 단 한 번의 공격을 통해 수십만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킬 수 있기 때문에 최악의 테러를 방지하기 위한 연구를 할때 사린 사건이 자주 언급된다.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사건, 옴진리교 국토이용계획법 위반사건, 카메이도 악취 사건, 마츠모토 사린 사건, 메구로공증인사무소 사무장 납치 감금 치사 사건 등의 온갖 대형 강력 범죄를 저지르던 옴진리교는 그 결과 이들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기 시작하면서 경찰 수사가 포위망을 좁혀 오자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교주 아사하라 쇼코는 경찰의 수사력 및 관심을 분산시켜 궁극적으로 옴진리교가 조사받는 사태를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지금까지와 수준이 다른 대규모 테러를 일으키기로 작당했다. 특히, 테러 대상으로 도쿄의 주요 관공서가 밀집된 지역 등을 골라 일본 정부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것까지 노리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미 이성적인 판단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미 계속적으로 테러를 저질러 왔기 때문에 옴진리교는 요주의 대상으로 찍혀 있었다. 이 상황에 대규모 테러를 저지를 경우 오히려 제일 먼저 용의 대상으로 지목받기 쉽다. 역시나 이 사건이 터지자 옴진리교는 확실하게 몰락의 길을 걷는다. 궁지에 몰리자 망상에 빠져 폭주해 최악의 사건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1995년 3월 20일 아침 8시, 옴진리교는 한창 직장인들과 학생들의 출근 및 등교로 바쁜 러시아워 시간대에 제도고속도교통영단(영단)이 담당하는 노선에서 총 5개 편성을 노려 차량에 대량의 사린 가스를 살포했다. 실행자들은 각각 2명씩 패를 이루어 1명은 지하철에 탑승하여 사린을 담은 비닐봉투에 구멍을 내는 식으로 사린을 살포하고, 다른 1명은 살포자를 태워 도망치는 운전수 역할을 맡았다.

마루노우치선과 히비야선에 각 2편성, 치요다선에 1편성을 노렸는데, 이들 3개 노선의 공통점은 도쿄의 주요 관공서 밀집 지역을 지난다는 것이다. 카스미가세키로 불리는 이 지역은 대한민국의 세종대로와 비슷한 지역으로서, 이 지역에 위치한 주요 성급 부서만 해도 법무성, 후생노동성, 환경성, 경제산업성, 총무성, 국토교통성, 재무성, 문부과학성, 외무성 등 9개에 이르며 또한 이들 부서의 산하 기관들+공사 합동기업체들이 수두룩하게 밀집해 있다. 당연히 통근하는 공무원들이 많았고 그들을 핵심 타겟으로 노려 사린 가스를 살포했다. 평상시에는 출근 시간이 9시 30분까지지만, 사건이 일어난 월요일은 아침 일찍 조례를 하는 곳이 많아 사건이 일어난 시각 즈음에 출근하는 공무원들이 많았다고 한다. 즉 옴진리교 내부에 이런 일본 정부 관청가의 내부사정을 잘 아는 자가 있었다는 뜻이다. 옴진리교 문서 초반에 나와 있듯이 옴진리교는 일본에서 정말 옴진드기와 같은 존재였던 것.



일본 재판소는 실행범들의 죄질이 운반책보다 나쁘다고 봤다. 무기징역 판결을 받은 하야시 이쿠오를 제외하고 전원이 사형 확정된 반면 운반책들 중에는 2018년 7월 6일 사형당한 니이미 토모미츠를 제외하고 사형 확정자가 없다. 나머지 운반책들의 경우 무기징역 판결을 받았다.



하야시 야스오는 교주 아사하라 쇼코로부터 스파이 의심을 샀다고 하며, 이것이 그를 과격파로 만들어, 후술하는 바대로 도쿄 지하철(히비야 선)에 가장 큰 피해를 유발했다. 같은 피해를 당한 마루노우치 선과 치요다 선을 비롯하여 다른 도쿄 지하철 노선들이 아침에만 운전 승무를 정지하고 오후부터 운전 승무를 재개한 것과 비교한다면 엄청난 피해 규모이다. 또 이 자의 도주 중 행보도 비판 대상인데,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 사건 후 장기간 도주하다 1년 9개월 만인 1996년 12월 3일 오키나와현 이시가키시에서 오키나와 현경에게 체포됐을 때, 이 자의 소지품에서 작은 불상이 나왔고 그 불상이 다름 아닌 하야시 야스오 자신 때문에 사망한 지하철 승객들의 영면을 기도하기 위한 불상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사고를 일으켜서 지하철 승객들을 사망하게 만들어놓고도, 자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도망 다니는 주제에 뻔뻔스럽게 자신 때문에 사망한 지하철 승객들의 영면을 기도하기 위해 불상을 소지했다? 이건 완전히 병 주고 약 주는 꼴이고, 엄청나게 비판받을 부분이다.



교주 아사하라 쇼코는 이 사건을 비롯하여 그간 옴진리교가 일으킨 각종 사건의 주범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옴진리교는 강제로 해산당한다. 하지만 아사하라 쇼코가 체포된 후에도 잔당들이 모여서 새로운 조직을 건설했다. 이 사건의 용의자들은 사건 발생 후 17년 가까이 장기 지명 수배 되어 있었고, 2012년이 되어서야 모두가 체포되었다.

이 일로 도쿄 경시청과 공안조사청의 고위 간부들의 목이 줄줄이 날아갔다고 한다. 이 일 이후로 일본 경찰 특히, 도쿄의 경찰들은 업무가 완전히 빡세졌다고 하며 신흥 종교들은 일본 경찰이나 공안조사청의 매의 눈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1995년 1월의 고베 대지진과 함께 일본 경제 침체기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히고 있다.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의 무능한 행보와, 지속되는 경제 불황으로 인해 다시는 일본 정계에서 혁신계가 야당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또 경제 불황, 고베 대지진에 이어 사린가스 테러까지 터져 수천 명도 넘는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자, 일본 내에서는 세기말적인 분위기까지 돌았다. 전설적인 애니메이션인 신세기 에반게리온 특유의 음울하고 어두운 분위기는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우울증과 더불어 이런 세기말적인 사회적 배경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하는 사람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