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미술의 정점 '백제금동대향로'
1993년 12월 12일(일)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 향로.
향로가 제작된 시기는 520~534년 사이로 추정되며 7세기,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신라에게도 패배한 백제가 다시 안정을 되찾고 꽃피운 문화를 상징하는 유물이다.
부처는 물론이거니와 도교에서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 혹은 신선이 조각되어 도교와 불교적 요소가 모두 있다. 무엇보다도 그 조각 솜씨가 워낙 놀라운 수준이라 백제 문화의 정수로 손꼽힌다. 일반인들에게도 신라의 금관처럼 백제하면 떠오르는 멋진 상징적 유물이 없던 차에 그 빈 자리를 메웠다.
충청남도의 새로운 마스코트 "충청이"의 모티브이기 하다.
능산리 고분군을 찾는 관광객들을 위한 주차장 건설현장에서 주차장 공사가 임박한 때 물웅덩이 진흙 속에서 발견되었다.
오랜 세월 땅 속에 묻혔음에도 불구하고 금동향로가 진흙에 잠겨 산소가 차단된 채로 있었기 때문에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였다. 이와 더불어 바닥에서는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 나아가 주변에서는 섬유 조각도 발굴되었는데, 백제금동대향로를 감싼 천이 세월이 지나 삭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발굴 결과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된 곳이 원래 사찰 내에 부속된 대장간 자리였음을 알게 되었다. 국보 제 288호 부여능산리사지석조사리감(扶餘陵山里寺址石造舍利龕)에 새겨진 명문으로 미루어보아, 해당 사찰은 백제 성왕의 명복을 빌고자 왕실에서 세운 곳인 듯하다.
언론에는 첫 발견되고 11일이 지난 12월 23일에 보도되었는데, 여러 주요 일간지에서 모두 1면 탑 기사로 국보급 백제 유물이 발견되었음을 대서특필하였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전체 높이가 61.8 cm이며 크게는 4개 부분으로 구성 되어 있다. 용 모양의 향로 받침, 연꽃이 새겨져 있는 향로의 몸체, 산악도가 솟아 있는 향로 뚜껑, 뚜껑 위의 봉황 장식이다.
향로에 뚫린 구멍들은 0.6 cm 정도지만, 개중 몇 개는 1 cm 정도로 조금 더 넓게 확장되어 뚫려 있다. 처음 제작되었을 때 생각보다 향이 잘 타지 않아서 구멍 몇 개를 더 크게 만든 듯하다. 구멍은 모두 12개인데 향로 제일 위에 있는 봉황의 가슴에 2개, 향로 뚜껑 상부에 5개, 그리고 중부에는 5개씩 뚫려 있다. 이중 중부에 있는 구멍은 향의 연기를 배출하는 용도가 아니라 바깥에서 공기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뚫린 구멍이다. 이렇게 바깥 공기가 들어옴으로써 향로 안에서 대류가 일어나 향의 연소 시간이 길어지도록 한다.
향로 본체의 가운데 테두리의 구름 문양 아래에는 연꽃이 핀 연못이 있고, 그 위인 뚜껑에는 봉우리가 3개 있는 여러 산이 있다. 이 산에는 말을 타고 사냥하는 사람, 신선으로 보이는 사람들, 호랑이, 사자, 원숭이, 멧돼지, 코끼리, 낙타 등 많은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곳곳에 폭포, 나무, 불꽃 무늬, 귀면상 등이 있다. 제단 모양으로 꾸며진 정상에는 봉황이 날개를 펴고 춤추고 있다. 이 새가 봉황이 아니라 닭이라는 학문적 소견도 일부 있다. 물론 보통 닭은 아니며, 백제 왕실을 상징하는 천계(天鷄)라는 것이 그 의견이다. 불교 및 도교의 영향을 다수 받은 것이 백제 후기 유물들인데 여타 신수와 영물에 비해 이러한 조류 조각이 많다는 점과 더불어 그중 다수의 조류 조각에서 며느리 발톱으로 추정되는 묘사가 보인다는 점 등이 주된 이유다.
그 아래에는 다섯 악사가 있어 소, 피리, 비파, 북, 현금 등 악기를 연주한다. 그 주위의 다섯 봉우리에는 각각 기러기로 보이는 새가 봉황과 함께 춤추는 형상이 있다. 향로의 몸체에는 연꽃이 있는데, 그 위에 갖가지 새와 물고기가 새겨져 있다. 또 한쪽에는 무예를 하는 인물도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발가락이 5개 있는 용이 위의 연꽃을 물고 하늘로 날아가려는 듯 용틀임을 하고 있다. (표현에 대한 묘사는 객관적인 것이고 따라서 원전에서 따온 후 출처를 명시. 출처 : 서정록, 백제금동대향로, 도서출판 학고재)
또, 당시 한반도에는 없었던 원숭이나 코끼리 등등이 조각되어 있고, 연꽃이 나타나는 등 불교적 요소와 더불어 봉황이나 신선 같은 도교적 요소가 조각으로서 공존하여 당시 국제교류가 활발했음을 시사한다. 나아가 이러한 다양함은 여러 사상이 공존했던 해상국가 백제의 문화적 면모를 증빙한다. 보통은 중국 북위 쪽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지만, 서정록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