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찰스 러트위지 도지슨(Charles Lutwidge Dodgson), 루이스 캐럴은 필명이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수학자이자 소설가, 사진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초창기 사진 역사의 주요한 작가이기도 하다.
잉글랜드 북부 채셔 지역의 작은 마을인 데어스버리에서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캐럴은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고 생각이 깊었지만, 말을 심하게 더듬었기 때문에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였다.
도지슨 일가는 성공회 성직자 집안이었고, 루이스 캐럴의 아버지도 성공회 사제였다. 루이스 캐럴도 1861년 성공회 성직자 서품을 받았지만, 내성적인 성격과 말더듬이 때문에 신자들 앞에서 설교하기를 두려워해서, 평생 설교대에 서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작품 속에서 가득 넘쳐나는 유머와 위트를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850년, 찰스는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처치에 들어가서 수학을 전공했다. 이후 1855년부터 크라이스트처치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말더듬이 워낙 심해서 좋은 교수가 되지는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교수가 되었을 즈음 해서 헨리 리들(Henry Liddell)이 크라이스트처치의 학장으로 부임한 후, 그는 헨리의 자식들과 금방 친해졌고, 그 중에서도 로리나(Lorina), 이디스(Edith), 특히 앨리스 플레전스 리들(Alice Pleasance Liddell)를 아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여기에 관련해서 루이스가 앨리스에게 청혼을 했다가 거절당했고, 루이스는 앨리스의 의견을 존중하여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들과 살았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명확히 하자면 루이스는 리들부부에게 앨리스와 결혼하고 싶다는 완곡한 제안을 했다는 모톤 코헨 교수의 주장이 있다. 모톤 코헨 교수는 루이스의 전기를 쓴 사람 중 하나인데, 그는 82년, 북미 루이스 캐럴 협회에서 한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20~40%가량의 미출간된 루이스 캐럴의 일기부분을 읽고나니 그가 앨리스와 결혼하고 싶어했다는 확신이 들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캐럴이 앨리스에게 청혼을 했다는 루머의 사실 여부는 논란이 분분하다. 이 루머는 캐럴이 리들 부부에게 1863년 어떠한 제안을 하고 그 이후 리들 가족에게서 멀어진 사실과, 캐럴의 사후 캐럴의 친척들에게 공개된 캐럴의 일기장에 이 시기를 포함한 10년 가량의 부분이(서양에서는 "the cut pages document"라고 불린다) 누군가에 의해 찢어져 있었다는 점, 그리고 캐럴이 생전 여러가지로 의심이 갈 짓을 많이 했다는 점을 종합해 생겨난 것인데, 실제로 청혼을 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이후 캐럴의 친척들이 일기장의 찢어진 부분의 개요를 적어놓은 종이가 발견됐는 데, 그 내용은 캐롤이 리들 부부와 멀어진 이유는 캐롤과 "로리나"의 별명인 "이나"와의 안 좋은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여러가지로 떡밥덩어리인게, 로리나(당시 14살)는 앨리스의 언니 이름이지만, 앨리스의 어머니의 이름도 로리나였고, 소문이 났다는 것 뿐이라 확실한건 어디에도 없다.
많이 알려진 앨리스와의 떡밥 때문에 싸이 간지글로 러브스토리를 만들어서 유포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루이스 캐롤은 절대 아이들을 그런 쪽으로 터치하지 않았다.
1898년 기관지염으로 사망했다.
대표작으로는 1865년 출판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그 후속작인 1872년 출판된 거울 나라의 앨리스가 있다. 이 작품이 사회 전반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앨리스 마니아가 없는 분야가 없을 정도여서, 철학자, 수학자, 물리학자, 심리학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특히 물리학에서는 빅뱅 우주론, 카오스 이론,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등을 설명할 때 약방의 감초처럼 인용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증후군이라는 질병도 있을 정도.
그 외에도 장편시인 스나크 사냥과 장편동화인 '실비와 브루노'를 썼으며, 몇몇 수학에 관련한 책과 논문을 썼다. 빅토리아 여왕이 앨리스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고 그가 쓴 책을 모두 읽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가, 수학책과 수학 논문들을 받고 당황했다는 일화도 있다.
세상을 바꿨다는 건 사실로, 그의 대표작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현 시대에 창작된 작품에도 모티브로 쓰인다. 문화계 전체에 캐럴의 손이 닿아 있으며,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앨리스라는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 외에 언어유희를 잘 사용하는 걸로도 유명하며, 셰익스피어처럼 이 사람이 현대 영어에 추가한 신조어가 꽤나 된다. 영문학계에서 그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가 다 있다. 그러나 앨리스 이후 작품들은 패러독스적인 면이 전혀 없고 감상적이어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대표적인 예가 장편동화 <실비와 브루노>인데, 내용은 엄청나게 방대한데 구성, 캐릭터성은 별로여서 앨리스 2부작에 비해 관심을 별로 받지 못한다.
초현실주의나 1960년대 사이키델릭 문화도 캐럴에게 많이 빚지고 있다. 앨리스에 등장하는 흰토끼는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노래로 재탄생해 사이키델릭 록 걸작으로 꼽힌다.
본래 직업이 수학자이자 수학 교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로서의 업적이 지나치게 위대한 탓에 오히려 본직에서의 업적은 묻혀버린 감이 있다. 앨리스 2부작이 사실은 일종의 수학논문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동화의 이름을 빌려서 본인의 수학적 관점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앨리스 2부작이 수학 논문이라는 것까지는 과장된 주장이라고 할지라도, 실제로 그 속에서 공리, 추론 규칙, 수학적 정리 등에 대한 여러 관점이 드러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의 수학적 업적 중 가장 유의미한 것은 논리학적인 메타 정리로, 어떤 수학적 정리를 정리로서 도입하는 것과 확장된 추론 규칙으로 도입하는 것 사이에는 논리적 구조의 차이가 있다는 증명이 그에 의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수학자로서의 루이스 캐럴과 관련된 이런 일화도 있다. '찰스 도지슨(1832~1898)은 루이스 캐럴이라는 가명으로 쓴 동화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잘 알려져있다. (중략) 빅토리아 여왕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너무도 재밌게 읽었기에 캐럴이 다음에 쓴 책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자 (중략) 다음 책은 여왕에게 도착했다. 제목은 <연립선형방정식과 대수적 기하학에 적용된 행렬식에 관한 입문서>였다.
'하루에 1분씩 늦어지는 시계는 2년마다 한 번씩 정확한 시각을 가리키지만 멈춰 있는 시계는 하루에 두 번은 정확한 시각을 가리킨다. 따라서 멈춰 있는 시계가 더 정확하다'는 넌센스 퀴즈인 '고장난 시계 역설'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고장난 시계도 하루에 두번은 맞는다는 격언도 여기서 기인했다.
소아성애 논란이 있다. 캐럴이 소아성애자였는지는 그야말로 백년 넘게 묵은 떡밥인데, 육체적인 성적 접촉은 없었기에 논란이 분분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쓴 계기도 자신이 사랑하던 열두 살 짜리 소녀 앨리스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앨리스와 만날 때마다 들려 준 이야기를 어느 날 앨리스가 책으로 써 달라고 부탁하자 집에 가서 밤을 새며 책을 썼다고 한다.
주된 논란은 아이들의 부모의 허락을 받고 여아들의 나체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려서 보관했던 것이다. 그 사진들은 아이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는 캐럴의 유언에 따라 거의 불태워버려 현재는 몇 장 남지 않았고 그림들은 모두 아이들의 부모에게 돌아갔다. 부모가 불태우지 않거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남은 사진만 몇 장 남아있다.
코헨을 비롯한 캐럴의 전기를 쓴 작가들은 모두들 캐럴이 소아성애자였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고, 특히 코헨 교수는 "그의 사진들이 순수하게 예술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는 남에게는 물론이요, 자신에게조차 인정할 수 없을 아이들을 향한 감정이 있었을 것이며, 그의 사진과 그림들은 그 감정의 배출구가 아닐까"라며 거의 확신하는 입장이다. 소아성애자라고 단정짓지 않는 작가들마저도 "캐럴이 아이들에게만 관심을 쏟고, 성인들의 세계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캐럴은 생전에 "나의 사진이나 그림에는 한 치의 에로티시즘도 없다"고 친구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캐럴의 조카는 "캐럴이 아이들에게 호감을 가진 것은 교사로서 아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수업시간 중 모든 아이들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라고 말했다. 예전에는 캐럴이 소아성애자였다고 보는 사람이 많았지만, 부풀려진 이야기도 많고 결정적인 증거도 없고 해서 꼭 소아성애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 힘을 얻고 있다.
한편 캐럴은 생전에 "설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를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을 때 그 아이가 조금이라도 옷을 벗는 것을 꺼려한다면, 나는 당장 그 요청을 그만두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신성한 의무라고 느낀다."라고 썼다는 말도 있고, 아이들과 성적인 접촉을 한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실제로 앨리스 본인도 캐럴이 자기에게 아무 짓도 안 했다는 말을 남겼다. 물론 직접적인 행위가 없었다는 걸 소아성애자가 아니라는 근거로 볼 수는 없다.
소녀들의 후기로는 '애들 말을 잘 안듣고 지 좋을대로 하는 사람이지만, 좋은 사람이었고 이야기는 대단히 재미있었다.' 근데 이 말을 한 소녀의 다른 이야기를 보면 3~4시간 동안 줄곧, 그것도 즉석에서 이야기하게 한 다음, 같이 놀자고 하거나 다른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해서 루이스는 애들도 눈치챌 정도로 부자연스럽게 자주 자는 척을 했다고 한다.
반면 어린 남자애는 싫어했다고 한다. 남아 있는 편지 중 하나는 소녀의 부모님과 소녀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이다 못해 찬미의 기색마저 느껴지는데, 소녀의 남동생의 대목에 이르면 온갖 욕을 다한다.
하지만 또 소년을 싫어했다고만 보기도 힘든 것이, 그레빌 맥도날드(공주와 고블린으로 유명한 판타지 작가 조지 맥도날드의 아들)라는 소년과 매우 친밀했고 앨리스 이야기의 출판도 이 소년이 "이런 이야기는 6만 권 정도는 있어야 돼요"라고 말한 일로 결정했다고 한다. 원래는 그냥 앨리스나 아는 아이들에게만 구두로 이야기해주거나 보여주었다.
당시 소녀 말고도 소년이나 가족들을 대상으로 찍은 사진도 많다.
루이스 캐럴은 말더듬이 증세가 있었는데, 이상하게 어린이들 앞에서는 말을 더듬지 않아서 이야기를 술술 말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어린아이들을 좋아했다고. 또한 실제 앨리스 이후의 작품에서 캐럴은 어린이들의 순수함을 찬양하는 내용을 기술했다.
유명한 사진이지만, 루이스 캐럴은 생전에 소녀들과 육체적 접촉을 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 사진은 합성이다. 아래 두 사진을 교묘하게 포토샵해 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