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사건
1971년 8월 23일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 실미도(현 인천광역시 중구 실미도)에 위치한 대한민국 공군 684부대 북파공작원들이 부대원을 살해하고 부대를 이탈하여, 시외버스를 탈취해 청와대를 향해 돌진하다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방동(현 동작구 대방동) 유한양행 본사 앞에서 자폭한 사건이다. 당시에는 '8.23 난동사건'이라고 칭하였다.
684부대의 창설과 활동
1968년 1월 21일, 소위 '김신조 사건'으로 알려진 1.21사태가 일어났다. 북한이 무장 게릴라를 보내 당시 국가원수였던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그 복수(김일성 암살)를 계획하게 된다. 이를 위해 3군에 1개씩 이를 전담할 특수부대를 창설했고, 그 중 공군 산하에는 684부대가 창설되어 실미도에 비밀훈련기지를 마련하였다. 훈련 과정이 혹독하고 사망률도 높아서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하며 일부 부대원들이 탈영하여 무의도 주민들을 인질로 잡고 성폭행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물론 탈영하여 범죄를 일으킨 이들은 즉결 처분되었다.
그러나 남북 적십자 회담으로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중앙정보부장이 교체되는 등 상황이 변하면서 암살 계획은 점차 뒤로 밀려나고 잊히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부대 예산 착복에 의해 이들에 대한 대우도 나빠졌다. 봉급이 끊기고, 음식 배급이 부실해져 굶주리고, 자원한 소대장 김방일 공군중사 1명 외에는 특수전 출신 교관 및 조교들이 대부분 떠나고 이쪽과 별 관계없는 기간원들이 들어오는 등 상황이 나빠지자 이들은 점차 불안해져갔다. 소설 실미도의 저자 백동호에 따르면 보안 유지를 위해 부대원들을 몰살시키자는 얘기도 나왔다는 것을 부대원들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불만 때문에 박정희를 만나 담판을 짓고자 부대원들이 기간병들을 죽이고 탈영하였다.
부대원들의 탈주와 최후
결국 불만을 품은 이들은 1971년 8월 23일 반란을 일으켜 훈련을 담당하던 공군 교관들과 기간병력들을 살해, 섬을 장악한 후 탈주해 인천에 상륙했다. 기간병력들 중 출장 나가있던 김방일 소대장과 병 5명 등 총 6명이 살아남았으며, 이들은 화장실이나 숲 속에 숨거나 바다에 뛰어들어 어선에 구조되어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684 부대원 1명도 교전 중 사망했다. 김방일 소대장은 사건이 난 다음날 오전에 배를 타고 복귀하고 있었는데, 684 대원들이 탄 배가 이 배와 마주치며 지나갔지만 김방일 소대장은 알아채지 못해, 상륙하고 나서야 참상을 발견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육군 제33보병사단(현 제17보병사단) 예하 해안 경계 부대의 저지선을 뚫고 인천과 수원 간을 운행하던 현대 R192 시외버스를 탈취하여 경인국도를 타고 부평, 소사, 영등포를 거쳐 청와대로 돌격하려 시도한다. 당시 동승했던 버스 운전사의 증언에 의하면 실미도 부대원들은 정부에서 자신들을 섬에다 가두고 죽이려 했다면서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박정희를 죽이겠다고 말한다. 이들은 무장공비로 간주되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방동(현 동작구 대방동)의 현재의 유한양행 구 본사 건물 앞에서 당시 서울지역 향토사단이던 육군 제30보병사단 예하 병력 등 육군, 경찰 부대에 포위, 저지되었다. 당시 대방동에는 계룡대로 이전하기 전의 해군본부 등이 위치해 있었으며, 지금도 해군 및 공군회관, 국군재정관리단 등 소수의 군사시설이 남아있다. 잘 안 알려져 있었지만, 당시 해군본부 역시 무장공비가 본부 인근에서 농성중이라는 보고를 듣고 비상이 걸려 주둔지 방어 전투배치 명령이 떨어지고 실탄이 지급되는 등 난리가 났다. 여기서 684 부대원들과 진압군은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는데 갈수록 684 부대원들이 불리해졌다.
결국 포위망을 돌파할 가능성이 없어지자, 부대원 대다수는 버스 안에서 수류탄으로 자폭하였다. 하지만 그들 중 4명은 죽지 않아, 체포되어 군법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당시 오류동의 공군 2325전대에서 총살됐다. 그리고 그들은 시신마저 제대로 된 장례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암매장되는 것으로 처리되고 만다.
당시 정부는 처음에 무장공비라고 발표하다가, 하루만에 군 특수범이라고 말을 바꿨다. 하지만 당시 신민당 국회의원이었던 육사 7기 예비역 육군 준장 이세규 장군이 그들의 정체가 정부 발표처럼 ‘군 특수범’이 아니라 공군 산하의 무장 특공대였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바람에 정부는 하는 수 없이 또다시 말을 바꿔야 했다. 이 사실을 폭로한 이세규 의원은 유신 정권 이후 남산에 끌려가서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들이 실미도에 4년정도 수용되어 있었고 처우에 불만을 품고 사건을 저지른것까지는 당시에도 언론에 의해 밝혀졌지만 정부의 통제로 인해 더 이상은 보도를 못하게 하고 빠르게 묻혔다. 당시 정치권에서 진상규명 요구를 통해 정치문제화 되면서 암암리에 "북파공작원들의 탈출 난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1987년 6월 항쟁 이후 본격적으로 금기의 영역에서 벗어나 특수부대 난동사건으로 자세히 알려지게 되었다.
사건 이후
1999년 실상을 파헤친 소설 실미도가 발간되고 2003년에는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가 개봉되면서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2004년, 이 사건 당시 살아남았다가 체포되어 군법재판을 받고 사형당한 4명의 신원이 알려졌다. 한 예비역 공군장교는 실미도 부대의 생존 기간병과 공군정보요원의 증언 등을 근거로 4명의 신원이 임성빈(충북 청주), 김종철(대전), 이석천(인천), 김창구(충북 옥천)라고 밝혔다.
2017년 8월 23일 실미도 희생자들을 위한 합동봉안식이 이루어졌다. 유골함 20위와 위패 2위가 봉안소에 안치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군법재판으로 인해 처형 뒤 암매장된 4명의 시신은 오리무중인 상태다. 국방부에선 매장지와 시신을 찾기 위해 현장 목격자 등 제보자를 찾고 있다.
684 부대 창설 멤버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김방일 소대장은 이후로도 공군에서 계속 복무했으며, 준위까지 진급하고 1990년 퇴역했다. 이후 유일기업의 대표로 살다가 684 부대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했고, 영화 실미도도 관람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에 작고했다.
정부의 공식 발표와는 달리 실미도 사건 당시 훈련병 중 생존자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인 사람 중 한 명이 소설가 백동호로, 자신이 만났다고 주장하는 생존자을 주제로 쓴 소설이 바로 실미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