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홍길동 대도 조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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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홍길동 대도 조세형


2021. 5. 29.

1970 ~ 80년대에 대한민국에서 활동했던 도둑. 총 전과 16범으로, 별명은 '대도'(大盜)이다.



전라북도 전주에서 출생. 그는 고아 출신으로 16살 때부터 먹고 살기 위해 도둑질을 시작하여 1982년 이전까지 11차례나 붙잡혀 감옥살이를 한 전력이 있었다. 한때 김준성 전 부총리, 장영자를 비롯하여 국회의원, 부유층 등 유명인사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만 골라서 털었으며, 그가 훔친 물건 중에 장영자가 소유한 막대한 가격의 물방울 다이아몬드가 있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조세형은 자신에게 도둑질을 당한 몇몇 집은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않고 쉬쉬했다는 발언을 했으며, 사과박스 등의 뇌물 같이 불법으로 얻은 돈 때문에 그랬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훔친 돈의 일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는 등. 자신만의 절도 원칙을 분명히 한 도둑으로 유명하다. 그가 2차 공판에서 밝힌 5원칙은 다음과 같은데 첫 번째와 세 번째는 지켜지지 않았다.

1. 나라 망신을 시키지 않기 위해 외국인의 집은 털지 않는다.

2. 다른 절도범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판·검사집은 들어갔다가도 그냥 나온다.
3. 연장사용금지.
4. 가난한 사람의 돈은 훔치지 않는다.
5. 훔친 돈의 30∼40%는 헐벗은 사람을 위해 사용한다.

또 김준성 전 경제부총리 자택에서 권총 3정과 실탄 2백여발을 훔쳐나와 장충동파출소에 몰래 갖다 놓은 일도 있었다.

당시 사회적 불만이 팽배해 있었던 상황이라 주로 부유층을 털었던 조세형을 영웅, 의적 등으로 미화하는 풍조가 퍼지기도 했다.

이로 인해 1982년 11월에 체포된 조세형은 1983년 4월에 자신이 갇힌 법원 구치감에서 탈출하여 5박 6일간 피신하다 주민의 신고를 받은 경찰의 추격을 받았다. 그는 지붕을 건너고 담을 넘어 경찰을 따돌리며 재빨리 도주하다 결국 어느 가정집 욕실에서 경찰관과 대치했고, 결국 경찰관의 권총에 피격당한 채 검거된다.

이후 그는 법원에서 징역 15년과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고 흉악범 수용으로 이름난 청송교도소의 1평짜리 독방에서 15년 내내 무릎을 꿇고 수갑을 찬 채 엄정 독거수용을 당했다. 조세형 본인은 자신이 부유층을 골라서 털어서 괘씸죄로 무거운 벌을 받게 되었다고 주장했고, 세간에서도 조세형이 출소할 시 부유층이 입막음조로 중형을 내리도록 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상습 범죄자였고 워낙 도둑질한 돈이 많았던 만큼, 그리 불합리한 판결인 것은 아니다. 범죄 횟수가 11번이니까 그 범죄 하나하나에 일일이 징역을 매겨서 이어붙인 것에 불과하다 라는 주장도 있으나, 우리나라 형법 체계는 영미법계가 아닌 대륙법계를 수용하고 있어 형기를 단순 합산하는 병과주의가 아닌 가장 중한 죄에 정한 형을 가중해서 처벌하는 가중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흡수주의와 병과주의로 보충하기에 위의 주장은 오류가 있다고 보아야한다.

수감 중이던 1990년에 그는 기독교에 귀의했고, 형기가 끝나가던 1998년 4월에 보호감호 7년이 적용되어 청송보호감호소로 옮겨지게 되자 조씨는 '보호감호 재심 처분'을 들고 일어났으나 1심에서 법원이 재범의 우려가 있는 데다 수감 기간 동안 기술을 익히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조씨가 패소했지만. 이후 항소심에서 "종교적 귀의는 진실되며, 15년의 수감 생활을 통해 쇠약해진 몸에 이미 50대에 이르러 재범 가능성은 작다"며 법원은 조씨의 손을 들어주었고, 그해 11월 26일에 마침내 출소했다.



출소 뒤에는 에스원에서는 그에게 많은 수당을 주며 자문위원으로 모셨고, 경찰행정학이 개설된 대학을 비롯해 각급 학교와 청소년단체에서 선도강사로 초빙되고 교회들은 그에게 신앙간증을 요청했다. 게다가 옥중 뒷바라지를 한 여성과 결혼도 했다. 이후 목사 안수를 받아서 목사가 된다. 나중에 늘빛선교회라는 선교단체를 설립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했고, 일본의 노숙자들을 구원하겠다며 일본을 자주 방문했었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의적에다 훌륭한 개과천선의 대명사로 꼽히는 그는 2000년 11월에 도쿄도 시부야구에서 주택 3곳을 털다가 현지 경찰에게 총을 맞고 잡혔다. 초기에는 묵비권을 행사하며 신분을 안 드러내려 했으나 정체가 드러나자 "일본의 보안 시스템을 점검하러 왔다."며 궁색하게 변명했고, 결국 법원에서 주거침입/절도죄로 징역 3년 6개월을 받아 복역했다. 그는 모범적 수형생활과 한국 지인들의 탄원으로 2004년 3월에 출소 후 귀국해 은거했다. 그런데 2005년 3월 24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모 치과의사 집에 침입해 165만원 어치의 손목시계를 훔쳐서 걸려 3년을 또 복역했고, 2010년 5월 4인조 금은방 강도들이 훔친 귀금속 1억원어치를 팔고 수수료 1천만원을 챙기는 등 장물아비 노릇하다 걸렸다. 검거 당시 전기 다리미를 휘두르면서 저항했다고 한다. 인간의 갱생이란 참 힘든 모양. 결국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사실 범죄에는 중독되는 성질이 있다는 점도 상기해 볼 만하다. 그를 변호했던 엄상익 변호사도 질병이라서 포기했다.

위에 나온 장물알선사건으로 징역 2년을 복역하고 2011년 9월 추석 연휴를 앞두고 출소했으나, 교도소 앞 10m를 걷던 시점에서 대기 중이던 경찰에게 연행됐다. 그 이유는 2년 전 부천 강도 사건 범인 민XX 등 2명이 조세형을 용의자로 지목했기 때문이었다. 조사 당시 그는 10년 전 강도사건 때 일본 경찰에게 총을 맞아 다친 오른팔을 근거로 "나는 도둑이며, 강도짓은 안 한다"며 결백을 증명하는 한편, 수십년간 해온 도둑 경력을 늘어놨다. 이후 12월 22일 서울동부지법에서 열린 1심 국민참여재판에서 2년 전 범행 혐의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2012년부터 도서출판 행복에너지와 계약을 맺어 자서전을 내려 했으나, 2013년 4월 3일 75세 들어서도 또 강남의 고급 빌라를 털다가 빠루로 유리창을 깨고 침입했지만 바로 출동한 경찰들에게 만년필로 저항하다 바로 잡혔다. 그 결과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출소 직후인 2015년 10월에 또 구속됐다. 이는 9월 7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소재 한 고급빌라에서 까르띠에, 쇼파드 등 명품 브랜드를 포함한 시계 5점과 반지 8점 등 총 5억6700만원 상당의 금품을 훔친 혐의다. 이쯤 되면 그냥 답이 없다. 말 그대로 도벽. 급기야는 목사 출신 범죄자의 일례로 거론되며 개신교의 목사 배출 제도에 대한 비판의 근거로까지 제시되었다.

이에 대해 범죄심리학 전문가인 표창원(전 경찰대학 교수. 이후 20대 국회의원 역임)은 후술할 시사저널 칼럼에서 전과자에 대한 사회적 냉대가 재범을 유발시켰다고 분석하여 캐나다와 영국의 사례와 같이 주위 사람들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이 재범률을 낮출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출소 후 81세가 된 그는 2019년 6월 1일 오후9시 서울 광진구에 있는 다세대 주택 1층 방범창을 뜯고 침입하여 현금이 든 저금통을 훔쳐 달아났으나 범행 6일뒤에 폐쇄회로 CCTV를 분석한 경찰은 그를 동대문구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검거하였다. 비록 그가 훔친 금액은 몇만원 밖에 안되지만 광진경찰서는 그의 범행이 상습적이라 9일 특수절도 혐의로 구속했다고 밝혔다.

2019년 8월 22일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이 선고되었다. 이에 그는 항소했으나 항소심에서도 1심의 실형이 그대로 선고되었다.



어린시절 김춘삼 밑에서 말단거지로 있었다고 한다. 소설 왕초나 드라마 왕초의 내용이 100% 거짓이라고 폭로한것도 조세형 본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