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21.
박초롱초롱빛나리 유괴 살인 사건
1990년대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유괴 살인 사건 중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다. 희생 아동의 길고 독특한 이름, 범인이 임산부란 점 때문에 더욱 사회에 깊이 각인된 사건이다. 언론에서는 거의 '박빛나리' 내지는 '박나리'라고 줄여 불렀는데 가끔 '빛나리', '박초롱'이라고 할 때도 있었다.
1997년 8월 30일, 범인 전현주(당시 27세, 여성)는 서울 잠원동 뉴코아문화센터에서 콜라를 마시며 서성이던 중, 영어학원의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귀가하던 박초롱초롱빛나리(당시 초등학교 2학년, 여아)를 구슬려서 소품제작실 겸 창고로 사용하던 사당동 지하창고로 유인, 유괴하여 당일 저녁 총 3차례에 걸쳐 박 양의 부모에게 공중전화를 통해 2천만원의 몸값을 요구했다. 전현주는 박 양의 집에 첫 번째 협박전화를 한 뒤 박 양에게 수면제를 먹였으며, 울면서 집에 보내줄 것을 애원하는 박 양을 목 졸라 살해했다.
전현주는 박 양의 유괴 다음 날 명동의 한 커피숍에서 박 양의 부모에게 전화 상에서 말한 액수의 금액을 준비해 갖고 나오라는 내용의 전화를 하던 중 발신지 추적으로 들이닥친 경찰의 검문에 걸렸다. 경찰은 전화가 걸려온 지 9분만에 신속하게 전현주를 포위했지만, 커피숍에 있던 13명의 사람(여자 12명, 남자 1명)을 허술하게 검문하다 임신 8개월 상태였던 전현주가 설마 범인이겠느냐는 안일한 판단으로 놓아주고 만다.
전현주가 용의선상에 있었기에 경찰은 이미 집 주변을 수사 중이었는데, 이를 지켜보며 의아해한 전 씨의 아버지가 9월 11일 경찰에 자신의 딸(전현주)이 범행 직후인 9월 1일부터 가출 상태임을 알렸다. 결국 통화 내역으로 꼬리를 잡힌 전현주는 9월 12일 신림동의 한 여관에서 검거되었다.
검거 당시 전현주는 임신 상태였으며 그 해 2월에 결혼식을 올린 상태였다. 내무부 산하 기관의 고위 공무원 출신 아버지를 둔 전현주는 유복하게 자랐으며, 본래 의사나 작가를 지망하고 있었으나 본인의 의지와 달리 모 대학 무역학과를 거쳐 응급구조학으로 전공을 바꾼 후 미국행 유학길에 올랐으며 사건 2년 전인 25세 때 당시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해서 총학생회 간부를 맡기도 했지만 사치와 낭비벽이 심했던 터라 결혼 후 3천만원의 빚더미에 앉게 되었고, 채무를 변제하려고 유괴를 계획하게 된다.
박양의 어머니 한영희씨는 범인의 검거 소식에 딸을 찾을 수 있으리라 굳게 믿으며 경찰서로 달려가 취재진들 앞에서 기도까지 하였지만, 머지 않아 딸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단 소식에 충격에 빠져 넋을 잃은 그 모습이 공중파로 전국에 방영되었다. 당시 박양은 서울 원촌 초등학교 2학년 5반에 재학 중이었는데,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원촌 초등학교의 학생들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유괴 소식에 PC통신을 중심으로 박초롱초롱빛나리 찾기 운동이 벌어졌고 공중파 뉴스에서도 범인의 육성을 들려주며 캠페인에 동참했다.
단독 범죄였기에 남편은 전현주가 유괴 및 살인을 저지른 것을 모르던 상태였다.체포될 때 남편은 망연자실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고 한다. 나중에 사건 현장인 사당동의 지하창고에서 그녀가 범행 당시의 상황을 재연을 할 때 "현주야! 아니지? 네가 그런 끔찍한 일을 할 리가 없잖아! 아니잖아! 아니라고 말 좀 해줘!"라고 울부짖는 남편의 절규가 공중파에서 방영되었다.
검거 후 범인은 자술서에서 검찰에 검거되기 전 부모가 자신에게 5번이나 자살을 권유했다고 썼다. 속죄하는 길은 자살뿐이며 부모도 곧 따라갈 테니 두려워하지 말라며 약국에서 살충제까지 구입해줬다고 한다. 그래서 검거 당시 여관 내부를 촬영한 뉴스 영상을 보면 테이블에 살충제 병이 그대로 나온다. 경찰 조사 도중 전현주는 그런 부모가 걱정되었는지 동생에게 부모님을 잘 보살펴드리고 자살하지 못하도록 막아달라는 당부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범인은 전문가들에 의해 연극성 성격장애로 진단받았다. 진술 도중에도 증언을 번복하고 성폭행을 당했다거나 공범의 존재를 주장하는 등 동정심에 호소하고 자신의 죄질을 낮추고자 온갖 이유를 동원해 변명하려 애썼다. 이때 공범이 있다는 진술이 언론을 타면서 뉴스에서 공범에 의한 2차 피해를 경고하기도 했으며, 끔찍한 범죄를 도와준 공범들의 존재를 믿었으나 얼마 후 임산부의 단독범행이라는 게 다시 밝혀지며 사회는 더욱 충격에 빠졌다.
검찰은 진술조차 거짓을 반복하는 전현주의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고 판단해 사형을 구형했지만, 결국 무기징역이 확정되어 현재까지 교도소에 복역 중. 2000년대 초반무렵까지 이런 극단적인, 사회적 쇼크를 준 사건에 있어서 판사가 피고인을 유죄로 보고 양형에 하는때에는 사형을 선고하는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점에서 당시에 상당히 이례적인 판결이라고 평가받았다고 한다. 수감된 지 몇 달 안 되어 딸을 낳았으며, 남편이 아이를 데려갔다. 현재 아이는 만 20세이며 미국으로 입양을 갔다고 한다.
박초롱초롱빛나리의 이름은 별처럼 빛나는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박 양의 아버지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부친은 당시로서는 꽤나 늦은 나이인 33세에 첫 딸인 박 양을 얻었기 때문에 지극히 아꼈다고 한다. 박초롱초롱빛나리는 부친이 지어준 이름에 어울리는 연예인 같은 직업을 꿈꾸었으나, 잔인한 범죄의 희생양이 되어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박 양은 유괴 9일 후인 1997년 9월 8일이 만 8세를 맞이하는 생일이었는데, 이 당시 박 양의 행방이나 생사 여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어느 때보다도 슬픈 생일을 맞이해야 했다. 박 양의 가족들은 주인 없는 생일상을 차리고 박 양의 무사 귀환을 기원했지만 나흘 후 범인이 검거되며 박 양은 생일을 맞지도 못하고 유괴 직후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이 사건 이후로 길거나 눈에 잘 띄게 아이의 이름을 짓는 사람들이 줄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 사건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993년에 이미 성을 제외한 이름을 5글자 이내로 제한하는 규정이 실시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과는 관련이 없다. 그리고 한때 이름이 길면 단명한다는 속설이 돌기도 했다.